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문단 편집) === 신항로 개척 과정 === 어린 시절의 행적은 불분명해서 태어난 연도도 자세한 기록이 없다. 콜럼버스는 동생인 바르톨로메오 콜롬보와 [[지도]] 제작일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동방견문록]]을 읽고 [[지구]]는 둥글고 세상은 그다지 크지 않으며, 바다 서쪽 끝에는 낭떠러지가 아닌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후술하지만 사실 당시의 사람들은 물론, 심지어 고대 유럽인들도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이때는 천동설과 지동설에 대한 논쟁뿐이었다.(요즘이야 우주 항공 기술 발달로 지동설이 입증된 지 오래지만 이시기는 천동설이 주류였다.)] [[지구]]는 둥글 테니까 서쪽으로 계속 항해를 하면 언젠가는 세계를 한 바퀴 돌아서 [[중국]]과 [[인도]]에 닿을 수 있으리라 믿었으며, [[지중해]]를 점거하고 있는 [[오스만 제국]]을 거치지 않고 교역과 거래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획을 세우고 스폰서를 구하며 [[에스파냐]], [[영국]],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 국가들의 지도자에게 지원 요청을 하지만 대부분 거절당했다. 이는 콜럼버스의 거리 계산이 터무니없이 어긋났고 콜럼버스의 요구 조건이 꽤나 까다롭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땅(신대륙)[* 이미 원주민들이 살고 있어도 스페인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처음 항로를 개척하고 발견한 섬이니 신대륙이다. 어차피 무력 진압할 거니 섬에서 나오는 것과 총독 자리까지 다 스페인 거라 생각 한 듯하다.]에서 나오는 보물 10% 및 그 섬들의 [[총독]] 자리를 평생 보장할 것' 외에도 꽤나 많이 요구했다. 동시대에 살던 [[마젤란]]의 요구가 '보물 5% 양도 및 기록에 대한 [[저작권]] 요청'에 그친 것에 견줘보면 날강도 수준이다. 그러다 마침내 [[이사벨 1세]]의 후원으로 탐험을 시작할 수 있었다. 여왕도 권력이 꽤 있었음에도[* 당시 스페인은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동군연합]]이었는데, 이사벨 1세는 카스티야 국왕이었다. 카스티야가 아무래도 아라곤보다 훨씬 컸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지원할 수 있었다. 물론 성과도 독차지할 수 있었다. 카스티야는 대서양에, 아라곤은 지중해에 접하고 있어서 대항해시대 이후 아라곤은 찬밥 신세가 된다.] 콜럼버스의 요구가 워낙 까다로워 여왕 자신이 아끼던 [[보석]]까지 팔아가면서 개인적으로 후원해줘야 했다고 한다. 또한 [[이사벨 1세]]는 자신의 왕관을 톨레도 대주교에게 팔았으며 그 왕관은 현재 톨레도 대성당에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1492년 8월 3일 [[스페인]] 카디스를 떠나 2달 10일 뒤인 10월 12일 지금의 [[바하마]] 제도에 상륙한다. 당시 콜럼버스는 그곳이 인도임을 굳게 믿었으며, 다른 사람들도 딱히 교차 검증할 방법이 없었기에 그가 인도를 갔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1498년 5월 [[바스쿠 다 가마]]가 인도를 발견했다. 유럽에서 동쪽으로 아프리카를 돌아서 항해해서 인도로 갔다. 이때부터 콜럼버스가 간 곳이 인도가 정말 맞는지 논쟁에 휩싸이게 된다. 바스쿠 다 가마는 인도에서 향신료 등 유럽인들이 인도에서 원하던 것들을 얻어오는 데 성공했으나, 콜럼버스는 그런 성과를 얻지 못했고 바스코 다 가마의 묘사와 콜럼버스의 묘사가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성과를 얻지 못한 콜럼버스 쪽이 더 불리했던 건 당연지사. 유럽인들은 둘의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 콜럼버스의 항해를 따라 갔으며, 결국 1503년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직접 아메리카를 가보고선 그곳이 인도가 아니라 신대륙임을 주장한다. 그럼에도 콜럼버스는 자신이 간 곳이 인도란 주장을 죽을 때까지 꺾지 않았고 신대륙의 이름은 아메리고의 이름을 따 붙여지게 된다. [[이사벨 1세]]의 신대륙 개척 지원에 대해선 세간에 알려진 대로 '여왕이 콜럼버스에게 개인적 흥미를 느껴 지원했다'라는 설보다는 다른 설이 좀 더 설득력 있다. [[레콩키스타]] 이후 스페인은 지중해 무역이 [[오스만 투르크]]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득세로 인해 설 자리가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했고 또한 옆나라 [[포르투갈]]이 [[인판트 동 엔히크|항해왕자 엔히크]]를 필두로 [[서아프리카]] 지역을 탐사 및 개발해서 막대한 이득을 챙기기 시작하는 것을 목격했다.[* 당시 포르투갈은 아직 인도 항로를 개척하지 못했다. 콜럼버스의 첫 탐험 이후 1494년에 [[바스코 다 가마]]의 항해단이 이를 성공시킨다.] 따라서 여왕은 신항로 개척이 나라의 미래에 큰 도움이 될 거라 내다보았고 이 때문에 콜럼버스의 탐험 계획과 요구를 살라망카 대학을 포함한 스페인 학자층, 그리고 정부 부처가 격렬히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원했다. 다만 여왕이 남편인 페르난도 2세와는 무관하게 개인 자격으로 후원했던 탐험이라 후에 신대륙에서 막대한 이득이 [[스페인]]으로 몰려왔을 때 덕을 보는 쪽은 카스티야뿐이었고 동시에 지중해 무역을 업으로 삼던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은 큰 손해를 입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